손골편지 열여섯 번째


손골편지 열여섯 번째
 
며칠 전 운전하다가 벼를 벤 논을 보았습니다. 윤달이 껴서 여전히 낮에는 덥지만 그동안 벼는 쑥쑥 자란 모양입니다. 성지는 창고로 쓰던 컨테이너를 치워서 주차장이 훤해졌습니다. 기념 십자가도 잘 보입니다. 무명 순교자 묘지로 오르는 길 입구에는 낙수가 있는 옹달샘이 생겼습니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할 때 저도 보기가 좋더라구요.
 
언젠가 어느 출판사에 놀러를 갔습니다. 대표님 사무실에서 얘기를 나누다가 점심 시간인 12시가 되어서 사무실을 나왔는데 복도에 직원들이 모여 있더라구요. 그래서 밥 먹으러 같이 가는 줄로 알았습니다. 근데, 이게 웬일! 복도 끝에 모셔진 성모상 앞에서 삼종기도를 바치는 게 아니겠어요? 깜짝 놀랐어요. 왜냐면 대표님은 교회를 다니다가 성당으로 개종한 분이었거든요. 대부분의 개신교 신자들은 성모님 공경을 부정하고 마리아교라고까지 비하하잖아요.
점심을 먹으면서 물어봤어요.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이가 뭐냐고, 두 군데 다 다녀봤으니 그 차이를 아실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대뜸 “걔들은 엄마 없는 아이들이에요.”라고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 말이 참 오래 기억에 남더라구요.
 
갓 신부가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봉성체를 할 때 차량 봉사를 해주시는 자매님이 있었어요. 자주 만나니 가까워졌지요. 하루는 그 자매님이 혹시 어디 아픈 데 없느냐고 물어보셨어요. 아무 생각없이 “신학생 때부터 축구하고 나면 오른쪽 무릎이 시원치 않았어요. 고질병이에요.”라고 답했어요. 실제로 그랬어요, 저의 아킬래스건은 오른 무릎이거든요.
“신부님, 제가 용한 한의사 선생님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한 귀로 흘리려고 했어요. 동네 한의원이라면 당연히 안 가려고 했지요. 그런데 아 글쎄 그분이 대통령 주치의를 하셨다잖아요. 귀가 솔깃해졌어요. 대통령 주치의면 옛말로는 어의잖아요. 동의보감의 허준도 어의였는데… 과연 어떤 분이길래 나라 안 최고의 의술을 지니셨을까? 궁금해졌어요. 게다가 제 외할아버지가 한의사셨어요. 그래서 한약 냄새만 맡아도 저는 지금도 기분이 좋아져요. 외가댁에 놀러 가면 꼭 미숫가루를 타 주시던 그 사랑 때문에 한약 냄새가 오히려 향기로워요. 그리고 여간해서는 안 낫는 무릎인데 그분을 만나면 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살짝 있었구요.
얼마 후 못이기는 척하고 한의원에 갔습니다. 만나 뵈니 연세도 지긋하시고 한눈에 기품마저 있어 보였어요. 역시 대통령 주치의는 달라도 뭔가 다르더라구요. “무릎이 아파서 왔습니다.” 그랬더니 “신부님이시냐?”고 하셨습니다. 맞다고 말씀드렸더니…대뜸, “신부님이 새벽에 묵주기도를 안 하시는구만!” 아니, 무릎하고 묵주기도하고 무슨… 묵주기도 안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축구하다 다친 건데… 억울했습니다. 근데 대학9장에 ‘자기 자신에게 악함이 없는 연후에 남의 잘못을 나무라고 자기 자신에게 선함이 있은 연후에 남에게 선을 권하는 법이다.’라고 했으니 그분은 새벽에 묵주기도를 하시는 게 틀림없었어요. 하지만 좀 억울해서 대체 선생님은 대체 몇단이나 하시냐고 물어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본전도 못 찾을까봐 입을 꽉 다물었어요.
암튼 그날 침을 맞기는 했지만 25년이 지난 지금도 무릎은 여전히 영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잊혀지지 않는 걸 보면 용한 침을 무릎이 아니라 마음에 놓으신 모양입니다.
 
추석이 낀 이번 달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십시오. 그리고 묵주기도 성월입니다. 게다가 날씨도 참 좋습니다. 묵주를 들고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여러 성지들을 방문해 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이번 달도 건강하고 기쁘게 지내시도록 매일의 미사 중에 후원 가족님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미아노 신부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