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순교자 4위

이름 없이 증언한 신앙,
손골 무명 순교자 4위

병인박해와 순교

병인박해(1866) 당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손골 교우촌에 숨어 생활하던 신자 네 분이 체포되었습니다. 이들은 수원으로 압송되던 중, 신봉동 개울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선참후계(先斬後啓)’, 곧 “먼저 참하고 나중에 보고하라”는 명령이 내려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공식 재판 절차 없이 현장에서 처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의 이름과 신상은 전해지지 않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순교하였다는 사실은 지역 교회 안에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서봉부락 돌무덤

사람들은 길가에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신봉동 개울가 작은 언덕에 구덩이를 파고 돌로 덮어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의 옛 지명이 서봉(栖鳳)이라 하여, 이 묘는 오랫동안 ‘서봉부락 무명 순교자 돌무덤’으로 불리며 전해졌습니다.
이후 행정구역 개편(1914년)으로 신리와 서봉리가 합쳐져 신봉리가 되었고, 현재는 신봉동으로 불립니다.


미리내성지 이장

수원교구는 순교자 현양 사업의 일환으로, 1976년 12월 17일 신봉동에 있던 네 분의 유해를 미리내성지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옮겨 모셨습니다. 이 해에는 다른 지역에 흩어져 있던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도 함께 이장되었습니다.


손골성지로의 안치

손골성지는 이 네 분이 손골 교우촌에서 생활하다 순교하신 분들이라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이에 ‘순교자 유해 안치를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준비를 거쳐, 2013년 10월 22일 네 분의 유해를 손골성지 내로 옮겨 모셨습니다.

묘 조성 시에는 지하에 석실을 마련하고, 유해는 각각 네 개의 항아리에 모셨습니다. 봉분은 하나로 조성하여 합장 형식으로 안치하였습니다.

현재 확인된 바에 따르면 네 분 가운데 남성 두 분, 여성 한 분으로 판별되었으며, 한 분은 DNA 채취가 이루어지지 않아 성별을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름 없이 증언한 신앙, 손골 무명 순교자 4위


병인박해와 순교

병인박해(1866) 당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손골 교우촌에 숨어 생활하던 신자 네 분이 체포되었습니다. 이들은 수원으로 압송되던 중, 신봉동 개울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선참후계(先斬後啓)’, 곧 “먼저 참하고 나중에 보고하라”는 명령이 내려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공식 재판 절차 없이 현장에서 처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의 이름과 신상은 전해지지 않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순교하였다는 사실은 지역 교회 안에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서봉부락 돌무덤

사람들은 길가에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신봉동 개울가 작은 언덕에 구덩이를 파고 돌로 덮어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의 옛 지명이 서봉(栖鳳)이라 하여, 이 묘는 오랫동안 ‘서봉부락 무명 순교자 돌무덤’으로 불리며 전해졌습니다.
이후 행정구역 개편(1914년)으로 신리와 서봉리가 합쳐져 신봉리가 되었고, 현재는 신봉동으로 불립니다.


미리내성지 이장

수원교구는 순교자 현양 사업의 일환으로, 1976년 12월 17일 신봉동에 있던 네 분의 유해를 미리내성지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옮겨 모셨습니다. 이 해에는 다른 지역에 흩어져 있던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도 함께 이장되었습니다.


손골성지로의 안치

손골성지는 이 네 분이 손골 교우촌에서 생활하다 순교하신 분들이라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이에 ‘순교자 유해 안치를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준비를 거쳐, 2013년 10월 22일 네 분의 유해를 손골성지 내로 옮겨 모셨습니다.

묘 조성 시에는 지하에 석실을 마련하고, 유해는 각각 네 개의 항아리에 모셨습니다. 봉분은 하나로 조성하여 합장 형식으로 안치하였습니다.

현재 확인된 바에 따르면 네 분 가운데 남성 두 분, 여성 한 분으로 판별되었으며, 한 분은 DNA 채취가 이루어지지 않아 성별을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